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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끄적임

또 다른 나, 아버지

슈퍼노아 2023. 3. 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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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교회에 전도사님이 새로 부임하셨다. 그분이 처음 나를 보시더니 아버지를 찾아가 대뜸 "아들 있으시죠?"라고 물어보셨다. 그 질문에 아버지는 참 기분이 좋으셨고, 당신을 꼭 빼닮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 정도로 어릴 때는 아버지와 내가 꼭 닮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늙어가셨고, 나는 어른이 되어갔다. 자연히 생김새도 많이 변하였고, 물론 아버지의 모습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자라면서는 오히려 어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고 해외에서 장기간 근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되었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더더욱 갖기가 어려웠다.

 

한 달 전쯤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오랜만에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일상적인 사는 얘기들을 하게 되었다. 얘기를 하면서 참 많이 놀랐다. 나도 놀랐고 아버지도 놀랐고 어머니도 놀랐다. 아버지와 나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시간관리, 일정관리, 자기 계발 등등 철저한 자기 관리의 모습이 거의 같은 사람이 양쪽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저렇게 사신다며 너무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때때로 너무 계획적으로 사는 것이 본인을 많이 힘들게 한다는 하소연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아내가 너무 동감한다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말 몰랐다. 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계신다는 것을.

아버지는 늘 책을 보고 공부를 하신다는 것, 회사에서 철저하셔서 좀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본인의 시간을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하고 자기 관리를  빈틈없이 하면서 살고 계시다는 것은 정말 몰랐다. 지금은 연세가 80이시고 은퇴 이후에 특별한 일거리도 없는데도 하루를 꽉 차고 바쁘게 보내고 계시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에 놀라셨고, 아내는 아버지가 그렇게 살고 계시다는 것에 '그럼 그렇지~' 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동병상련이 느껴져서인지, 고부간 평소 말도 많이 썩지 않던 둘이 갑자기 엄청 친해졌다. 옆에서 누나는 넌 어떻게 그렇게 됐냐며 난리가 났다. 누나 역시 평소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다는 것도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어릴 적 그렇게 닮았던 얼굴이 이제 생활 속에 녹아졌나 보다.

흔히 식구라는 말은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며, 밥을 같이 먹고살아야 가족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진짜 가족은 이렇게 서로 닮아 있는 모습에서 느껴지나 보다. 오랫동안 밥을 같이 먹지 않았는데도 거의 복제된 사람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 가족이구나 식구구나 난 아버지의 아들이구나.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닮아 있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음에 전신에 소름이 돋는 감격까지 경험하게 된다. 또 다른 나, 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잘 모셔야지.. 그리고 그 옆에서 내 아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어머니도 잘 모셔야지, 또한 어머니와 똑같은 답답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아내도 참 잘 모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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