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서 피어난 황제의 품격 — 조훈현 국수의 이야기

바둑의 제왕

 

세상에는 정상에 오르기보다, 정상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해낸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바둑계의 ‘제왕’이라 불리던 조훈현 국수일 것이다.

 

조훈현 국수

 

그는 바둑 역사상 유례없는 천재로, 9살에 프로 입단, 10살에 일본 유학을 떠나 명인의 내제자로 수련한 인물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국내 바둑계의 모든 타이틀을 독식하며 그야말로 ‘전관왕’의 위업을 이뤘고, 1989년에는 중국의 섭위평 9단을 꺾으며 세계 바둑사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의 승리는 단순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한국 바둑의 국제적 위상을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불멸의 제왕에게도 예기치 못한 순간이 찾아왔다. 자신의 제자로 들였던 이창호 9단에게 연속으로 타이틀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의 급성장 앞에, 스승은 참혹한 패배를 연이어 맛보게 된다. 바둑판 위에서, 그 패배는 단순한 점수 차가 아니라 ‘시대의 교체’로 읽히는 충격이었다.

 

그 순간 조훈현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뜻밖이었다. 바둑 실력을 논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체력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북한산을 오르며 체력을 기르고, 오랫동안 피워오던 담배를 끊었다. 그는 말한다. “모든 패배의 근원은 체력이 무너졌을 때 찾아온다.” 바둑의 세계에서도 결국 사람을 이기는 것은 사람의 힘, 그중에서도 지속 가능한 체력이라는 점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조훈현은 2003년, 만 51세의 나이로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기록을 세우게 된다. 한때 자신을 무너뜨렸던 제자 이창호가 “조훈현 선생님이 계셨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존재는 단순한 스승을 넘어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이긴 경기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진 경기의 복기는 다시 이길 수 있는 습관을 만든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승부의 흥미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 자기 자신을 다시 단련하려는 겸손, 그리고 복기(復棋)의 자세로 실패를 배우려는 태도이다. 조훈현은 이긴 경기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진 경기의 복기는 다시 이길 수 있는 습관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철학은 바둑판을 넘어 인생 전반에 깊이 울려 퍼진다.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선 황제, 조훈현. 그는 단지 강했던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낮아질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위대했다. 그가 바둑판 위에 새긴 것은 수천 개의 수보다 더 값진, 불굴의 인간 정신이었다.